아름다운 詩

[스크랩] 기울어진 가을

기찻길옆에서 靑旻 2008. 11. 1. 11:03

        기울어진 가을 박선희 기우뚱, 집이 기울어졌다 이십 몇 도 쯤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집도 늙으면 버틴 세월만큼 견고한 뿌리를 내리는 걸까 기울어진 집 안엔 여전히 불빛 몇 점 살림 살고 있다 늙은 집의 마지막 등골까지 빼먹고 있는 저 아찔한 불빛들, 기울어진 시선의 창살 속에 갇혀 전전긍긍하는 저 집의 유일한 표정은 기울어짐이다 기울어진 잠 기울어진 밥상 기울어진 대화 기울어진 방심 기울어진 체면 기울어진 세상 아, 무엇보다 기울어진 가을이다
        가을 어느 날, 창문 밖에서 소방차 사이렌소리가 요란하게 들립니다. 창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면서 21층 아래로 내다보니 오래된 주택가에 즐비한 빨간 소방차와 사이렌소리, 그리고 웅성웅성 모여든 사람들, 기우뚱, 한 집이 기울어졌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집도 늙으면 버틴 세월만큼 견고한 뿌리를 내리는지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늙은 집을 보았다. 만일을 대비해서 기다리던 소방차들은 그냥 돌아갔다. 밤이 되도록 그 집이 걱정되어... 다시 내려다보니, 세상에! 기울어진 집 안에서 여전히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늙은 집의 마지막 등골까지 빼먹고 있는 그 아찔한 불빛들의 삶, 그 집 때문에 온통 기울어짐이다. 기울어진 잠 기울어진 밥상 기울어진 대화 기울어진 방심 기울어진 체면 기울어진 세상 아, 무엇보다 기울어진 가을이다 -박선희
    출처 : 아름다운 시인의 숲
    글쓴이 : 박선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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